24/02/05 월
드디어 셀축을 떠나는 날이 왔다. 기차를 타고 3시간 반을 가야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남. 이글루같은 게스트하우스에 3박을 했더니 드디어 감기에 걸렸다. 몸살기운이 하ㅠ
일단 씻고 체크아웃을 한 후 조식을 위해 카페로 이동한다. 9시가 되기 전 셀축의 카페에는 출근하기전, 등교하기전 아침식사를 챙겨먹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엄청나게 단 디저트와 차를 어거지로 먹으며 잠을 깨고있었다. 여기서 즐기고 있는건 나뿐인 듯 하다. ^^
식사를 마친 후 기차역으로 이동. 셀축은 아주 아담한 소도시이기 때문에 기차역도 걸어서 갈 수 있다. 셀축역은 양방향의 레일이 하나씩 깔려있었는데, 기차의 진행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역 어디에도 없다. 어느 플랫폼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역무원에게 물어봤더니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가르쳐주길래 그렇게 했고, 다행히 제 시간에 맞춰 기차가 도착했다. 곧 나는 데니즐리(Denizli)로 출발했다.
데니즐리는 셀축으로부터 기차로 3시간 반정도 걸리는 도시이다. 셀축보다는 훨씬 대도시인데 사실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곳은 아니다. 다만 인근 마을에 아주 유명한 관광포인트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석회 온천 파묵칼레(Pamukkale). 석회 온천에서 발생한 침전물들이 언덕을 따라 계단식 모양으로 쌓여서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모양의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파묵칼레의 숙소는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버스로 30분 거리인 데니즐리에 숙소를 잡는 것이 정석이다.
점심때가 지나서 데니즐리에 도착했고, 7분거리의 가까운 호텔에 체크인 했다. 드디어 그 열악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벗어나 호텔에 입성했다. 여행 코스 중간중간에 호텔 하나씩 넣어주길 정말 잘한 것 같다. 감기때문에 좀 자고 싶었으나 이미 오후 3시였기 때문에 컵라면 하나 후다닥 먹고 바로 다시 나왔다. 파묵칼레로 가는 길은 대충 조사를 해 갔고, 호텔 로비에서 다시한번 안내를 받았다. 관광의 도시답게 호텔 로비가 엄청 친절하고 배차시각 표까지 세세하게 써서 알려준다. 감사히 안내받고 버스 정류장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지하2층에는 많은 플랫폼이 있는데, 이 중 76번 플랫폼에 파묵칼레로 떠나는 미니버스가 있다. 탑승 후 금방 출발, 30분정도 이동한 다음 기사님 안내에 따라 작은 마을에 내렸다. 근데 왜 내리는 사람이 나밖에 없을까? 내리는 사람도, 마을에 돌아다니는 관광객도 없이 텅 비어있는 상황. 심지어 버스 정류장 표지판도 없길래 잘못내린건줄 알고 결국 주변 부동산에 들어가서 물어봤다. 여기 어디예요? 일단 파묵칼레에 잘 내린건 맞고, 오르막길 따라 올라가면 입구가 나온다고 한다. 근데 왜 아무도 없지? 내가 너무 늦게온걸까.
어쨌든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보니 입구가 나왔다. 마치 꿈이 다른 꿈으로 전환되는 것 처럼 극적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본격적으로 석회로 덮힌 지역으로 들어서면 신발을 벗고 입장하라는 안내판이 있다.
신발을 벗고 석회 언덕을 오르며 걷기 시작한다. 바닥은 퇴적 침식작용으로 울퉁불퉁 하다못해 뾰족하게 모양이 나있고, 심지어 건조하고 딱딱한 상태라 지압판이 따로없었다. 이 지압판을 거의 30분을 걸어올라갔더니 감기가 다 나아버렸다.
파묵칼레의 언덕 아래쪽은 물이 말라있고, 언덕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유량이 조금씩 늘어난다. 고여있는 온천도 사이즈가 점점 커지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고여있는 물은 엄청나게 차갑다. 중간쯤부터 근처에서 등반중이던 또래 중국인과 친해져서 서로 사진찍어주면서 놀았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40분정도 걸렸다. 딱 걷기 좋은 거리.
사실 파묵칼레는 지금 많이 말라있다. 구글에 떠돌아다니는 사진과는 많이 다르다. 파묵칼레가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되고, 온천수의 분출이 줄어들면서 석회 지형을 지키기 위해 온천수의 수량을 조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있는 덕분에 제한된 구역만 출입할 수 있고, 경치가 괜찮은 곳도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파묵칼레의 대표적인 포토 스팟들은 대부분 말라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독특한 뷰이긴 하나 그렇게까지 이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뷰를 살려내려면 선셋이라는 타이밍 버프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선셋까지는 아직 30분은 더 기다려야 할 듯. 그래서 언덕 꼭대기 너머로 계속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여기는 히에라폴리스라는 고대 도시. 여기 뷰가 정말 엄청나다.
작고 한적한 마을 → 새하얀 석회 온천산 → 푸른 초원과 고대도시로 이어지는 다이나믹한 도보여행. 이 지역도 상당이 넓고 유적이 많은데, 원형 극장, 성 빌립보 성당, 아폴로 신전, 고고학 박물관 등등 볼거리가 많다. 로마 원형 경기장이나 그리스 신전이 남아있는 곳 자체가 흔치 않을텐데, 진짜 질리게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초원을 거닐다보니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파묵칼레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씬을 보게 된다. 석회 온천이 마치 거울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고, 하얀 언덕엔 색이 입혀졌다.
낮의 풍경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파묵칼레는 늦은 오후에 오라는 조언을 따르길 참 잘했음. 나는 어떻게 이렇게 계획을 야무지게 잘 짜는걸까. 해가 지기 직전까지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올때도 지압판. 주변을 보니 또 나만내려오고 있다. 알고보니 입구가 여러개 있었고, 투어 버스들은 지압판이 없는 곳으로 여행객들을 안내해 준다는 것. 그래도 나는 감기가 나았으니 개꿀이다.
다시 신발을 신고 마을로 내려왔을 땐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다행히 내려오자마자 딱 버스랑 마주쳤다. 데니즐리로 돌아와 핫 윙을 뜯으며 오늘 당일치기 파묵칼레 여행의 막을 내렸다. 하루종일 밥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런지 미친듯이 맛있었다.
파묵칼레는 정말 신기하고도 멋진 장관이었고 분위기가 180도 다른 히에라폴리스도 있었기에 오늘 하루 좋은 도보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물이 많이 말라 있어서 만족도가 덜 했기 때문에 딱 2시간 반짜리 코스인 듯 하다. 오지 않았으면 나중에 스스로 아쉬워 했겠지만 파묵칼레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다른 튀르키예 여행자들에게는 추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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